° 실린 글 순서 °

권두언 _ 최헌국

예수살기와 설교 _ 조헌정

예수살기와 성경 _ 박종국

하늘품 _ 김철호

지리산만인보 _ 김광철

예수살기 날짜별 활동 _ 편집부

지역소식

연대활동

예수살기 후원 요청서

회계 보고

권두언

풍수지탄(風樹之嘆)'

최헌국(예수살기 총무/생명평화교회)

얼마 전에 어머니 칠순을 맞아 칠순잔치를 가졌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싶어서인지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칠순잔치도 못해드리고 아버지를 보낸 것이 늘 마음 한구석 무거운 짐처럼 남아 있는 나는 칠순잔치가 효도의 전부로 대신할 수 없음을 알지만 동생들과 어머니 칠순잔치를 차려 드렸다.

어머니 칠순잔치를 준비하며 주변 분들께 알리고자 초청장을 만들면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글귀로 인사말을 준비해 보았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를 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 탄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풍수(風樹)란 자식들 때문에 고생을 하시는 부모를 뜻한다. 지탄(之嘆)이란 뒤늦게 슬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할 때의 일이다. 공자가 어느 마을 앞을 지나는데 <고어>라는 한 사내가 북망산(北邙山 중국 하남성 낙양 땅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공자는 의아해 그 까닭을 사내에게 물어보았다."그대는 무슨 일이 있기에 그리 슬피 울고 있소?""제가 공부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가슴이 아파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속을 썩여 드린 거라도 있소?""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공부를 마치고 출세를 한 뒤 부모님께 효도를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니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고어는 공자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손을 거두며 젊은이의 때 늦은 후회를 나무랐다. "돌아가신 뒤 울고불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뵙고 문안 인사라도 드렸어야지. 보아하니 젊은이는 반포지효(反哺之孝)란 말을 잊고 산 거 같소.""공자님, 반포지효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요?""젊은이, 까마귀는 겉으로 보기에는 새까만 게 볼품이 없지만 효심이 지극한 새요. 어릴 때 어미가 잡아다 준 먹이를 먹고 자란 걸 잊지 않고 어미가 늙으면 반대로 먹이를 잡아다 봉양(奉養)하는 새요.""그런데 요사이는 까마귀만도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만 가니 늙고 병든 부모들 마음이 어떻겠소?" 그러자 고어는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결심을 공자에게 밝혔다."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싹 말라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 서서 북망산을 바라보고 있을 작정입니다."

"젊은이, 그런다고 부모님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시겠소? 내 젊은이의 마음이 갸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그러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테니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런 일이 있은 뒤 공자는 <고어>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은 부모를 자주 찾아뵙고 맛있는 걸 수시로 사다 드렸다. 그중에는 잠시 벼슬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연로한 부모를 모신 제자도 나왔다고 한다.

풍수지탄(風樹之嘆)

이 말은 오늘 예수살기를 해 나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이지 않나 생각 해 본다. 내 가정 ,내 교회의 일들만 우선하려하다 이 사회 이 민족이 시퍼렇게 멍들어가는 것을 보며 뒤늦게 후회막급 하는 지경의 선상에서, 예수살기를 해보자 나섰지만 여전히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의 홍수와, 하고 싶은 일들의 홍수 속에서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하여 놓치는 것이 참 많은 것을 볼 때에 다시 한번 깊이 새겨봐야 할 이야기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부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 (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은 봉양하고자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네

往而不可追者年也 (왕이불가추자년야)

흘러가면 쫓을 수 없는 것은 세월이요,

去而不見者親也 (거이불견자친야)

나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어버이이시라

예수살기와 설교

성전을 허물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는 ‘하늘뜻펴기’

조헌정(예수살기 상임공동대표/향린교회)

(기독교사상 2009년 9월호 ‘특집, 오늘 우리의 설교를 말한다’에 실렸던 글입니다.)

1. 들어가면서 - 용어 사용에 대해 -

글쓴이가 담고 있는 향린교회는 1993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교회갱신선언서를 발표하고 예배에 민족문화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국악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우리가락에 관심 있는 교우들을 모아 국악기를 사용하는 예향이라는 찬양단도 발족하였다. 또한 예배의 형식과 용어들을 바꾸었는데 “설교”를 대신해서 “하늘뜻펴기”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잔소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설교하지 마라”고 한다. 설교에 대한 세평이 이러하니, 땅에 떨어진 설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우리말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설교 대신 ‘하늘뜻펴기’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설교를 ‘하늘뜻펴기’라고 쓴다. 그리고 신구약성서에 대한 명칭도 제 1,2 성서로 바꾸고 신에 대한 명칭 또한 ‘하느님’으로 한다.

2. 개신교의 위기 극복은 하늘뜻펴기의 회복으로부터

2005년 기준으로 남한의 종교인 분포는 불교 22.8% 개신교 18.3%, 가톨릭 10.9%이다. 지난 10년 동안 개신교 숫자는 줄어든 반면 불교와 가톨릭은 그 숫자가 증가하였고, 2008년 가톨릭 숫자는 공식적으로 500만을 넘어섰다. 각 종교의 신뢰도는 복수 응답의 결과 가톨릭이 66.6%, 불교가 59.8%인 반면 개신교는 26.9%에 불과했다. 가톨릭과 비교할 때 개신교인의 숫자가 두 배 가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도는 반 이하이다. 개신교의 현실을 반영하는 수치이다. 현재 개신교의 숫자는 840만이다.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앞으로 10년 안에 개신교와 가톨릭 숫자는 거의 비슷해 질 것이고 개신교가 환골탈퇴하는 어떤 혁명적인 변혁을 꾀하지 않는다면(불가능에 가까운 기대이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면 그 숫자는 지금의 절반 아니 어쩌면 3분지 1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는 글쓴이의 지나친 과장일까? 현재 대형교회 교인의 평균연령은 60세이다. 농촌교회에 가면 60세는 청년회 회원이다. 그리고 2, 30대의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신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평신도를 ‘병신도’라 공공연히 부르며 지극히 혐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분명하지 않는가?

가톨릭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적 신뢰에 대해 스스로 답하기를 “인권과 민주화를 실천해온 한국 가톨릭의 역사가 신뢰의 비결이며, 여기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뒷받침하고 있어 젊은이와 지식인층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함께 하는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반면 개신교 목사들은 여전히 교회성장이라는 옛 패러다임에만 매여 있다. 미국과 남한과는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고 기독교국가라는 미국도 보수근본주의 우파 교회들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보다 더 미국대형교회들의 성장 프로그램들을 쫓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들을 브랜드 효과만 생각하여 구입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펼쳐 놓은 ‘교회성장 세미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요즘 중소도시의 재래시장 상인들이 초대형 매장과 대재벌에 맞서 반기를 들고 서로 연대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나눔과 희생을 예수정신으로 선포하는 교회는 왜 이런 기본적인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을까? 초대형교회들을 향해 대형버스를 운영하여 작은 동네 교인까지 싹쓸이 하는 것은 예수의 나눔 정신에 위배되고 총동원주일을 설정하여 선물공세를 펼치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왜 소리 높이지 않는가? 그건 목사 자신들이 바알의 성공신화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체 개신교 숫자가 아무리 줄어들어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만은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야베스의 성공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최근에 남한 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드러내는 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한 한국인 신학도가 독일의 교회사 교수를 만나 ‘중세교회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했더니,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이 ‘중세교회사를 공부하려면 지금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연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정말 목사들이 깨어나야 할 때다. 하늘뜻펴기에서부터 그 근본 틀을 바꿔야 한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성공신화를 배격하고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를 좇아 가난한 자의 편에 선 예언자적인 하늘뜻펴기에 주력해야 한다.

3. 하늘뜻펴기의 기본은 예언자의 사명 구현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수난사이다. 복음서의 출발이 되는 마가복음은 예수의 생애 전체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초점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다. 이를 향해 처음부터 물량적인 시간을 넘어 급하게 달려가고 있다. ‘즉시로’ ‘그때에’ ‘곧바로’ ‘그리고’ 등 이것들이 마가복음의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주로 등장하는 시간 부사들이며 가장 긴 부사는 ‘수일 후에’이다. 마가복음서는 예수 수난사이다. 절반 이상을 수난의 이야기에 할당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탄생이야기와 예수말씀(Q어록)이 없다. 반복되는 수난의 예언이 주음(主音)을 이룬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일생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예수 수난의 이유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예언자 세례 요한이 당시의 통치자 헤롯왕을 비난하는 일로 옥에 갇히자 이에 그를 대신하여 세상에 나오신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1장 14절 표준새번역).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정치적인 탄압을 받자 그를 대신하여 나오신 것이다. 공생애 시작 동기가 정치적이다. 그리고는 당시 사회 체제의 근간이 되는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어김으로 종교지배세력과 자꾸만 부딪힌다. 가난하고 병든 갈릴리 사람들(οχλοs, 민중편)에 서는 일로 말미암아 정치지배세력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세력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손을 맞잡는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3장 6절) ‘곧바로’라니? 이미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그 이전부터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는 이 두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이천 년 전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리의 관계였다. 그리고 이 지배세력과의 부딪힘은 성전을 숙청하는 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묘사한다.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11장 16절) 성전 뜰을 가로지르는 물건들은 제사용 제기들과 희생 제물이었다. 그렇다면 성전 제사를 방해했다는 것인데, 이는 수많은 제사장들과 성전 일에 종사하는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 경비병들을 제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실제 사건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물의를 빚을 만한 중대한 사건(범죄?)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 예수는 로마제국에 위협을 가하는 정치범들에게만 주어지는 십자가형을 받는다. 이상은 종교적인 전(前)이해없이 읽혀지는 간추린 예수 죽음 이해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가 가장 맨 뒤에 놓고 있는 이 성전 숙청 이야기를 맨 처음에 둔다. 이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전 숙청을 단지 장사꾼들을 내쫓았다는 단순 해석을 넘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2장 19절)는 성전 파괴론자로 나선다. 물론 이는 유대교에 대한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문자주의적 태도를 벗어난다면, 이는 성전 밖의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성전제일주의’ 혹은 ‘제사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예수를 ‘교회성장론자’가 아닌 ‘교회파괴론자’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늘뜻펴기는 ‘인간 구원과 해방에 관한 약속과 성취’라는 큰 구도에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궤적과 선포하신 말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선포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깊은 의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전을 허물라함은 무슨 뜻인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하느님의 법인 율법은 유대 사회법의 근간으로 주로 안식일법 정결법 할례법 등으로 백성들의 삶 전체를 옥죄이고 있었다. 특히 이런 법들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었다. 곧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압제세력과 하나 되어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갈릴리의 민중들을 억압하는 세상 지배세력의 본거지였다.

당시 성전은 ‘나는 곧 나다.’(공동번역)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새번역) 하시며 애굽 제국의 바로왕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한숨과 고통의 소리에 반응하시며 약자의 하느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야훼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배반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시어 아버지의 잃어버린 명예 곧 약자와 억울한 자의 대변인의 자리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허물라고 하시는 ‘이 성전’은 솔로몬 왕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속하다가 이천년 전 로마에 의해 사라진 예루살렘 성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성전’이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민중들의 삶을 옥죄이는 모든 지배기제를 통틀어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숙청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성전 안만이 아니었다. 성전 밖이었다. 그래 요한복음은 ‘성전을 허물라’고 명하는 것이다.

4. 하늘뜻펴기가 펼쳐져야 할 본래의 장소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동의하는 바지만 특히 요한복음에서의 성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부활의 몸으로서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하는 그곳이면 성전이다. 건물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는 거리에서 하늘뜻을 펼쳤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 나오는 베드로의 하늘뜻펴기, 스데반의 하늘뜻펴기는 모두 거리에서 행해졌다. 다만 가르침과 떡을 떼는 친교가 집안(건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본래 예수님도 첫 사도들도 모두 거리에서 민중들이 거하는 그곳에서 하늘뜻을 펼쳤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향린교회는 5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두차례는 민중들의 아픔이 있는 현장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려왔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아파하는 평택의 대추리와 도두리 그리고 파주의 무건리를 찾아 주민들과 함께 예배하고, 한반도운하를 반대하는 종교인 도보 순례단과 함께 예배하고 북한강을 따라 걸었으며, 올해 5월에는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 저들이 희생당했던 불탄 건물을 바라보며 따가운 태양 볕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아스팔트 위에 음식을 펴놓고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였다. 이런 현장예배가 용산과 같이 가까운 거리라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수백 명의 교인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평택이나 파주까지 가려면 비용이나 준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향린교인들은 이러한 거리예배에서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셨던 참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며 이것이 예수께서 원하는 바,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세우는 일임을 확인한다.

이외 민족민중정신과 역사인식을 함양하기 위해 교회 나름의 특별주일을 정해 지켜오고 있다. 3․1절 산상예배, 4․19민주의거와 5․18광주민중항쟁기념주일, 6월민주항쟁기념주일 등이다. 특히 11월에는 전태일열사기념주일을 통해 노동자들의 고난에 찬 삶을 기억하고 그 주일 오후에는 청계천 5가 기념비 앞에서 거리기도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10월 첫 주일은 한신대의 자연의 숲 속에서 향린의 세 자매교회가 함께 모여 세계성만찬주일로 지켜 오고 있다. 이 밖에 전주 완주군에 있는 들녘농촌자매교회와의 정기적인 강단 교류를 통해 도농간의 벽을 허물고, 교회탐방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교회들, 특히 공동체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다.

5. 하늘뜻펴기의 다양한 형태

하늘뜻은 반드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연을 통해서 때로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때로는 침묵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남한교회는 너무 일방적으로 서로마교회의 전통에만 매여 있어 하늘뜻펴기를 인간의 이성과 언어 논리에만 의존하고 있다. 글쓴이는 동로마교회의 수도원적인 침묵영성의 전통 또한 중요하게 여겨 주일 예배에서 장로님들의 목회기도 이후 2분간의 침묵기도를 하고 있고 하늘뜻펴기 또한 온전히 침묵으로만 하늘뜻펴기를 한 적이 있다. 2년 전 분당 샘물교회의 선교단 두 명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주일 글쓴이는 저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종교간의 소통과 화해를 위한 침묵 하늘뜻펴기를 25분간 진행했다. 침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묵으로 진행한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고, 마치 얘기를 시작할 것 같은 몸짓을 계속하였다. 중간중간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촛불과 몇 개의 예수 십자가상을 보여주었다. 교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남아 있다. 말로 한 하늘뜻펴기였다면 진즉에 잊어버렸으리라!

또한 글쓴이는 요한계시록 하늘뜻펴기를 연속으로 하는 과정에서 한번은 계시록에 묘사되는 여러 장면들을 재현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20여명의 50개의 작품들을 (여기에는 중세시대의 성화들뿐만 아니라 피카소 그리고 이중섭을 비롯한 정신대 할머니의 작품까지) 영상으로 만들어 그림을 통한 하늘뜻펴기를 전한 적이 있다. 계시록에서 들려지는 천상의 음악들을 오늘에 재해석하는 일은 아직도 나의 꿈으로 남아 있다.

흔히 하늘뜻펴기는 성서본문(text, 텍스트)을 오늘의 상황(context, 컨텍스트)에 재해석해 내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글쓴이가 보기에 이런 이해는 너무나 단순하여 주관적인 잘못을 범하기 쉽다. 글쓴이에게 있어 텍스트는 성서본문 자체가 아니다. 성서본문과 성서본문이 써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텍스트이다. 이 ‘관계적 텍스트’를 텍스트로 하여 오늘의 사회적 상황에 넣을 때에 ‘상황적 텍스트’가 나온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늘뜻이다. 그리하여 글쓴이는 거의 빠짐없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얘기를 처음이든 끝이든 어디에선가 언급한다.

흔히 하늘뜻펴기는 전하는 방식에 따라 강해, 주석, 주제, 절기 등으로 구분한다. 글쓴이는 이 모든 방식을 골고루 도입하여 이야기형태로 전하고 있다. 올해는 ‘이 땅에 살다간 예수들’이라는 제목 아래 인물중심의 하늘뜻펴기를 진행하고 있다. 안식년 3개월과 절기들로 인해 중간에 끊어지기는 했지만, 문익환 김재준 함석헌 김교신을 거쳐 지금은 류영모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하늘뜻펴기를 하는 이유이다.

저는 이 땅의 사회 부조리와 민족분열의 위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올 1월초 이 땅을 살다간 선배들의 믿음과 삶을 되새겨 보는 하늘뜻펴기를 시작했습니다. 500년을 이어 내려온 조선의 역사를 총칼로 중단시키고 조선반도의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엽전으로 비하하고 전 국민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어가는 일제의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면서 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반도와 같이 외세에 끊임없이 휘둘렸던 피식민지 유대 땅에서 갈릴리 민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나 서른 살 남짓의 피 끓는 젊음의 정열로 로마제국의 힘의 논리에 대항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한 인물이 이제는 도리어 제국들을 떠받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여 다시금 식민지 조선의 땅에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구원의 메시야로 전해진 서구화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고 살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서구 특히 미국화되어 버린 남한 교회의 자기 뿌리를 찾는 토착화 운동이자 자본과 물질 그리고 욕망이 지배하는 오늘의 성공주의 시대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역사적 예수신앙의 회복운동이기도 합니다.(2009년 7월 26일 하늘뜻펴기 중)

6. 하늘뜻펴기는 목사들만의 전유물인가?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여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언한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 2:9) 오늘날 남한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평신도들의 주체적 권리 곧 ‘평신도 제사장직’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하늘뜻펴기 또한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글쓴이는 일 년에 여러 차례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실행하고 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사와 교우 간에 깊은 영적 유대감을 갖게 됨은 물론이요, 평신도들 또한 직접 하늘뜻펴기를 해봄으로 목회자들이 갖는 고민과 수고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목사는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이해하는 하늘뜻펴기를 통해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말씀의 지평을 깨닫는다. 목회의 기본이 교인의 성숙에 있다면, 백번 하늘뜻펴기를 듣게 하는 것 보다 단 한번이라도 직접 전하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요즘의 평신도들은 테이프, 인터넷과 TV를 통해 하늘뜻펴기를 밤낮으로 접하고 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없다. 평신도들에게 목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평신도목회이다. 주일예배가 힘들다면 수요예배를 통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보면 목사가 더 큰 은혜를 받는다. 성전을 허물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깊이를 경험하게 된다. 더불어 공동축도까지 행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글쓴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이 ‘평신도 제사장’직의 정신에 따라 함께 손을 잡고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복의 말씀으로 서로를 위한 축도를 드리고 있다. 목사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내어 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번 실행해 보면 뜻하지 않은 목회의 결실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개신교가 가톨릭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평신도 제사장 신학이다. 지금은 처음의 개혁정신과 성서 근본으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이다.

7. 나가면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몰려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이를 시기하며 보고한다. 이때 요한은 말한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한 3장 27, 30절) 과연 그러한가 깊이 성찰해야할 부분이다.

이제 악독한 일제시대에서 교사로서 꿋꿋하게 성서의 말씀에 따라 살려 애쓰며 <성서조선>을 통해 하늘뜻펴기를 펴시다가 옥고를 치루고 끝내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치유하려다가 돌아가신 김교신선생의 <조선에 필요한 기독교>라는 글을 인용함으로써 오늘 남한교회에서 하늘뜻펴기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한다.

“조선에는 부도 필요하다. 힘도 필요하다. 학문도 필요하다. 위대한 작품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히 기독교 청년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제도의 기독교가 아니다. 의식의 기독교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기독교다. 바울의 기독교요 요한의 기독교다. 성서의 기독교다. 영적 기독교다. 산 기독교다. 즉 그리스도다. 그렇다. 현재의 조선에 절실한 것은 기독교요. 그 기독교는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청년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제도와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를 얻으면 우리는 전부를 얻은바 되며, 그를 잃으면 우리는 전부를 잃게 된다.”

예수살기와 성경

달란트 비유 뒤집어보기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인가?

-비유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내부갈등과 비전

박종국(들꽃향린교회)

달란트 비유 이해의 핵심은 부의 축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 미덕이겠지만, 일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는 것을 남의 것을 빼앗는 수치스런 행위로 인식했다. 또한,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었던 갈릴리청중들의 대부분은 농부였다. 갈릴 리가 어떤 지역인가? 유다의 곡창지대로 로마의 집중적인 수탈과 착취를 받던 곳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의 4할 이상을 세금으로 뜯겨야 했다. 또 그와 별도로 성전세 명목으로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 착취를 견디다 못한 많은 이들이 노예나 일용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예수의 비유에서 “종”이나 “품꾼”이 등장인물로 자주 나오는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첫 번째, 두 번째 종은 각각 받은 달란트로 장사를 해서 100%의 이윤을 거둔다. 이런 폭리를 취하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자들은 다 도둑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농부청중들은 속으로 욕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폭리를 취한 종들을 칭찬하고 보상해 주는 이것이 하늘나라라니, 이것은 자기네가 매일같이 당하는 지옥같은 현실이었다.

반면에 세 번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장사해서 -남의 것을 착취하라- 이윤을 남기라는 주인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따르고 있지 않다. 주인의 질책과 형벌을 예상하면서도. 그리고 오히려 당신은 심지않은 데서 거두는 사람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청중들은 세 번째 종의 이런 행동이야말로 용기있는 행동이고, 자기네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유세비오의 나사렛 복음서에서는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환영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 몫을 빼앗지 않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기신념을 지킨 세 번째 종이야말로 칭찬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

한편, 비유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의 사회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 장사해서 폭리를 취한 첫 번째, 두 번째 종은 로마에 부역하면서 동족을 착취하는 유대의 지배세력이다. 그리고 이들의 착취를 칭찬해주고, 가진 자는 더 가지고, 못가진 자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하는 주인은 로마제국이다. 주인에게 혹독한 질책과 형벌을 받는 세 번째 종은 수탈당하는 대다수 유대의 농부들이었다.

비유를 듣는 마태공동체의 청중들은 자기네가 직면한 공동체의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혹독한 로마의 박해 앞에 로마권력을 일정부분 수용하면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그룹이 있었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비타협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자는 그룹이 있었다. 물론, 후자는 소수였고 상대적으로 영향력도 미미했다. 이들 앞에는 추방과 수배생활, 투옥의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번째 종처럼. 어느 길을 걸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신앙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

마태기자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는 세 번째 종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한다. 이 권면은 연이어 나오는 최후심판 비유와 맞물려 더욱 강화된다. 즉, 최후심판에서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지극히 작은 자들. 이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나그네고,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이었다. 감옥에 갇히고, 나그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추방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는 세 번째 종의 길을 떠오르게 된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좁혀오는 추적의 손길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을 쳐야하는 수배자의 길, 나그네의 길은 또한 비유를 말하는 예수자신이 예감하고 있는 세 번째 종의 길이기도 했다. 달란트비유와 최후심판 비유가 나오는 마태25장 바로 뒤에 26장부터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이야기가 나오고, 앞장에는 예수의 수난예고(20.17-19)와 예루살렘 입성(21.1-11)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마태의 예수는 세 번째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세 번째 종은 투옥과 나그네[수배자]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뒤이어 나오는 최후심판 비유의 지극히 작은 자와 연결되고, 마태의 예수는 이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 세 번째 종의 길을 공동체가 따라야 할 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늘품

우리 함께 손을 잡아요!

-개인파산면책의 성서적 의미와 교회의 역할-

김철호(대전예수살기 총무, 민생상담네트워크 ‘새벽’ 활동가 대표)

들어가며

IMF이후, 17조6532억원이라는 혈세가 투입된 제일은행은 단돈 5000억원에 ‘뉴 브리지 캐피탈’이라는 투기자본에 넘어갔다.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 만에 제일은행을 영국의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에 처분하면서 1조1500억원을 남겼다 그러고도 세금은 한 푼도 물지 않았다. 한미은행은 투기자본인 칼라일 펀드에 인수되었다. 칼라일 펀드는 2004년 11월 7000억원을 남기고 한미은행을 외국자본에 팔아넘겼다. 외환은행도 미국계 투기자본인 ‘론스타’에 팔렸다. 론스타는 2003년 10월 단돈 1조3800억원을 들여 자산 73조원 짜리 외환은행을 손에 넣은 후, 외환은행의 자산을 하나 둘 팔아치우면서 무려 3조원이 넘는 이익을 남겼다. 그러고도 외환은행을 통째로 매각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한편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되어 'KB'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 과정에서 KB는 외국투기자본의 지분이 85%로 늘어났다. 하나금융지주도 외국투기자본 지분이 81%로 높아졌다. 신한금융지주도 외국투기자본의 지분이 63.26%나 된다. 나머지 우리은행, 조흥은행도 외국인 지분이 50%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들 은행들은 외국투기자본들에게 의결권을 넘어 간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이미 한국의 대부분의 은행들은 우리나라 은행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모든 금융자본들은 기업금융보다 소매금융(개인과 가계금융)에 달려들게 되었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이익을 거두고 있다. 이는, 국내 금융시장에 몰려든 투기자본들이 다른 어떤 투자처보다 가계금융을 고수익의 투자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투기자본들은 기업대출보다 훨씬 이익이 많고 안정적인 가계대출에 주력하면서 고리의 이자 따먹기 놀음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은행들은 철저하게 이익만을 따져 가계대출에 몰두한다. 개인들의 집과 소득을 담보로 잡고 고리채 놀음을 벌여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기에 바쁘다. 또한 기업들의 돈줄을 쥐고 그들의 생존을 담보로 삼아 노동자들의 고혈을 쥐어짜도록 유도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투기자본들에게 과도한 배당금을 지급하느라 투자와 연구개발은 외면한 채 비정규직 늘리기와 하청업체 쥐어짜기에 혈안 되어 있다.

재벌들도 고용과 성장을 도외시 한 채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으로 변모 되어 가고 있다. 정부도 지주회사 제도, 금산분리 완화, 자본시장통합법 등 정책을 통하여 금융자본세상을 열어가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로인해 재벌들의 금융시장 참여가 가속화 되고 있다. 재벌들은 첨단금융기법을 구사하면서 그룹의 형태를 금융 자본적 성격이 강한 지주회사로 바꾸어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상황에서,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신용불량자’(현,금융채무불이행자,여기서는‘금융피해자’라고칭함)라는 제도를 법제화했다. 이로써, 정부는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취약한 대출관리능력을 보완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원활하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점에서,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대출 관리 능력은 거의 빵점에 가깝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의 현재의 상환능력이 얼마큼인지, 미래에 어떤 수입이 가능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금융기관의 영업능력이다. 또한 대출을 통하여 안게 되는 위험부담이 어떤 것이지, 대출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금융기관들의 판단이며 그들의 책임이다. 한마디로 금융기관이 대출의 위험부담을 지는 것은 필요불가분한 것이고, 대출을 회수하지 못할 위험성은 일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사회에서는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하면서 채무를 지게 되어 되갚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경우, 파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개인들의 생활경제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서민들일수록 경제위기와 사회적 역경을 버텨내기 힘들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오늘날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를 만나면 속절없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기업이나 개인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거나 개인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사회․경제위기 속에서 기업파산이 사회적문제로 대두되는 것처럼, 개인파산면책 역시 사회적 책임의 문제인 것이다.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치여 절망과 고통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개인채무자에게 공권력과 사법권을 동원하여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열하고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개인파산면책제도는 오늘의 사회․경제위기 속에서 개인채무문제가 사회공동체의 문제임을 증언한다. 나아가 금융자본세상에서 과중채무문제는 개인파산면책이라는 사회․경제적 기술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제, 개인파산면책제도는 신자유주의 금융경제의 종주국인 미국과 유럽을 넘어, 일본으로,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활성화 되고 있다. 이처럼 개인파산면책은 전지구촌에서 개인의 책임성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술임을 인정받고 있다.

개인파산면책제도와 교회의 역할

1. 금융채무자들은 우리시대의 강도만난 사람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자본(맘몬)세상에서의 ‘400만 금융피해자’들은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온갖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버겁다. 한마디로, 이들은 우리시대의 강도만난 사람들이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우리시대의 강도만난 사람들인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자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IMF이후 맘몬(자본)세상이 되어버린 우리사회에서 “그들이 교회의 선한 사마리아인 역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깨달음이야말로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맘몬(자본)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음에 대한 가장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맘몬세상에서 교회의 선한 사마리아인 역할을 위한 신앙의 태도는 무엇일까? 성서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아 우리시대의 강도만난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강도 만난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부적 본성이다. 나아가 예수의 제자도를 실천해야만 하는 교회의 마땅한 신앙태도이다. 왜냐하면 강도만난사람의 고통과 절망의 상황이 그 시대의 죄악의 실체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과 공동체의 삶의 부조리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우리시대의 강도만난사람인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보고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들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구조의 희생양으로 인식하하지 못한다. 도리어 교회는 그들을 도덕적해이자라고 경쟁사회의 낙오자이며 실패자라고 정죄한 한다. 심지어 그들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규정한다. 이것은 교회가 철저하게 맘몬(자본)세상의 가치기준과 편견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투기금융자본들의 착취적 영업행태로 인한 피해자일 뿐이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400만 금융채무불이행자들을 금융자본세상에서의 피해자로 인식하는 출발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눈으로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바라 볼 때, 교회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 개인파산면책은 우리시대의 ‘출애굽’이다.

“맘몬(자본)은 우리시대의 분명한 압제자이다. 더불어 맘몬은 우리시대의 가장 큰 숭배의 대상이기도하다.”

한국교회의 정서도 바로 이와 같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70-80년대 맘몬을 주인으로 삼아 더 많은 부와 성장을 경험했다. 이 경험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의 맘몬(자본) 횡포를 보면서도 신앙의 저항을 벌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제, 신자유주의 맘몬(자본)세상에서 그 ‘자본’의 실체가 우리가 외면할 수 없으리만큼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서민들의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커지면 모두가 잘살게 된다는 맘몬(자본)의 유혹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부는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되었고,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있다. 그들이 꾸미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경제에 대한 술수와 억압이 더욱 교묘하고 추악해져가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의 질타를 겸허하게 새겨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맘몬(자본) 이 지배하는 ‘시장전체주의’야말로 한순간에 기독교인의 신앙관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느 순간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가장 큰 방해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 심지어는 종교계마저,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라는 신자유주의 맘몬(자본)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휩쓸려가고 있다. 교회도 경쟁에서 밀리면 도태될 수박에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맘몬(자본)세상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러한 맘몬(자본)세상의 압제와 술수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예수의 오심을 맘몬(자본)에게 압제를 당하며 부르짖는 가난한사람들의 생명의 신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이 땅의 생명공동체가 각자의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확신한다.(요한복음10:10) 우리는 그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다.

이점에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로써 교회의 사명과 역할은 우리시대의 강도만난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맘몬(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고 고통당하는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해방하고 보호하는 ‘하나님나라공동체’이어야 한다. 만약, 교회와 우리자신이 맘몬(자본)세상으로부터 구조적인 이익을 취하고 있다면 마땅히 우리의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한다. 교회와 우리자신이 신자자유주의 시장사회의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의 승리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한 우리의 결단과 행동이야말로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맘몬(자본)의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3. 개인파산면책은 우리시대의 희년선포이다.

개인파산면책에 대한 우리사회의 태도는 마18장 21-35의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태도와 같다. 그러한 태도야 말로 예수의 희년 선포를 방해하고 물거품으로 만드는 암초이다. 하나님은 맘몬(자본)세상에서의 모든 빚을 탕감하는 거룩한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희년의 희망을 성취하려고 하신다. 그런데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의 꿈이 산산조각 나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시대의 신자유주의 맘몬세상에서 정부와 기업과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과 사익을 지키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나아가 종교지도자들마저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과 이익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소유를 지키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희년의 복이 나누어질 기회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말과 행동과 십자가를 통하여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맘몬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희년을 이루어 내셨다. 예수는 압제당하는 사람에게 정의를 베푸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다. 또한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시며, 짓밟힘을 당하는 사람과 나그네 된 사람과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그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일생에 걸친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의 희년을 이루어 내는 데 온힘을 쏟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의 제자 된 교회는 이러한 예수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희년이 맘몬(자본)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점에서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사회적 낙오자라거나 도덕적 해이자로 몰아 멸시적 태도를 취하는 한국교회의 어줍은 청교도적 시각은 교정되어져야 마땅하다. 도리어 한국교회는 그들을 맘몬세상의 피해자들로 인식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마땅한 수혜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의 맘몬세상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질병가운데에서, 그로인한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마땅히 교회의 치유와 회복을 받아야할 권리가 있다.

나가며

앞으로도 자본(맘몬)세상에서의 금융피해자들은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이는 IMF이후 명명백백하게 노골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와 이로 인한 빈곤계층 확대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이다. 따라서 개인파산면책자도 늘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과 불평등도 점점 더 많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400만 금융피해자들은 우리사회 빈곤층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사회가 여전히 개인채무자에 대해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만을 퍼붓는다면, 우리는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어 숨통을 조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우리시대의 강도 만난사람들로 인정하고 감싸 안아야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400만 금융피해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치유하고 회복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맘몬세상에서의 금융피해자문제가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을 우리사회에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사회의 400만 금융피해자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사회의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리산만인보 (智異山萬人步)

김광철(전남 예수살기 총무)

단순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지리산 걷기인 지리산만인보는 2009년 8월 20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국시모), 구례지역 모임에서 최초로 제안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와 수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지라산만인보는 지금도 완결된 형태는 아니며 참여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만들어가는 모임입니다.

2010년 2월 27일 시작하여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지리산 둘레길 850리를 걷습니다. 세계적인 유행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만인보를 생각하며 걷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걸어 2011년 2월 27일에 마무리를 합니다.

1년 동안 지리산만인보를 생각하며 걷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리산만인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지라산만인보란 이름이 가진 뜻을 살펴봄으로 제가 생각하는 지리산만인보에 대해 말해볼까 합니다.

지리산만인보는 지리산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정향진화(定向進化) 과정에서 나타난 기적적인 인간현상”이라고 말합니다.(테야르 드 샤르댕 인간현상 가운데서) 이것은 마치 사막의 선인장이 백년 만에 한 번 꽃을 피우듯이, 지구라는 생명나무에 45억 년의 시간의 결과로 피어난 신비하고 경이로운 생명의 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출현이 있은 지 300만년 후, 이미 인간이라는 꽃향기로 가득해야 할 지구가 온갖 악취를 뿜으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사상에 기초한 인간의 자기중심적/명사주의적 존재방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명사주의적 존재란 문장에서 명사가 주어와 목적어로 쓰이듯이 인간이 주어와 목적어가 되어 자연을 인간을 위해 무분별하게 파헤치는 것을 말합니다.)

지리산만인보가 사람으로부터 시작이 아니라 지리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자기중심적/명사주의적 존재방식을 버리고 부사적 삶을 꾸리자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신화에는 인간 창조가 맨 마지막에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탈무드는 인간이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막내’로써 겸허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문장의 구성성분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장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품사로 부사를 들 수 있습니다. 막내로써 겸허함은 다만 있는 듯 없는 듯 부사적으로 삶을 꾸리며, 세상을 생명의 열매로 충만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자기중심성 버리자 좋다 그런데 왜 하필 지리산이냐?’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해인 196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의 시작점이며 민족의 사상과 정신, 역사와 전통이 녹아있는 곳이며, 민초들의 아픔을 품어주고 치유해준 산입니다. 개발이 심화될수록 민초들의 아픔은 더해가고, 역사와 전통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지리산은 “잘 살아보세”란 탐욕 아래 앞만 보고 질주해 온 우리네 삶을 돌아볼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상징입니다.

지리산萬人보는 만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철저히 개인 중심화 되면서 공동체는 파괴되어 가고 있으며, 경제가 발전할수록 함께 더불어 삶이 아니라 20대 80의 사회가 심화되어 10대 90의 사회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생각하며 걷는 것이 바로 지리산만인보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빵이 커져야 먹을 것도 많아지지 않느냐,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가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느냐, 예 일면 맞는 말입니다. 끼니를 걱정하며 힘겨운 보리고개를 넘던 시절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수많은 동, 식물이 멸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지리산만인보는 상기했듯이 인간만을 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뭇 생명을 보듬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걸음입니다. 이러한 뜻이 바로 지리산萬人보 속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지리산만인步는 지리산만인報가 아닙니다. 현대사회를 일컫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말이 바로 정보화 사회, 지식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나 지식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오로지 관념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관념들이 개발되었다.........지금은 관념을 위한 시대가 아니라, 사실과 행동을 위한 시대이다.”(기 드보르 스펙타클 사회 가운데서) 우리의 앎이 모자라서 세상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우리의 실천이 모자라서 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步는 정보나 지식을 나누는 장이 아닙니다. 우리네 삶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향해 몸을 끄-을-고 나가는 행동입니다.

(步)는 달리기(走)가 아닙니다. 전에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님, 전종훈 신부님의 기도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지나칠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느린 기도 걸음 가운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이 중심인 세상은 모든 것의 빠른 이동이며, 빠른 이동을 위해 필요한 것이 도로일 것입니다. 빠른 이동이 일상화 된다는 것은 주변을 보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리산만인보는 둘레길을 걸으며, 그동안 지나쳐 왔던 것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걸음입니다.

지리산만인보는 걷는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비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지리산만인보입니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지리산만인보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도 지리산만인보를 통해 내 삶이 변화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살기 날짜별 활동(2010.8.1511.15)

∙ 8. 15

1) 8.15 평화통일 예배

°일시: 2010년 8월 15일(주일) 오전 11시

°장소: 임진강역 광장

°참석:강남향린교회, 일산동녘교회, 좋은만남교회, 민통선교회, 생명평화교회

2) 8.15 통일 수련회

°일시: 2010년 8월 15일(주일) 오후 7시

°장소: 향린교회

°주제: 천안함, 전작권 연기의 문제점과 한반도 평화협정(강사:고영대)

8. 17

직무유기 경찰규탄 기자회견

°일시: 2010년 8월 17일(화) 오전 11시 °장소: 경찰청 정문

8. 24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방북/한상렬 목사 석방 촉구 기도회

°일시 : 2010년 8월 24일(화) 오후 7시

°장소 : 향린교회 (명동 소재)

°주최 :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한상렬 목사 방북 기독교대책위

9. 14-15

예수살기 교육영성위원회 성경공부 프로그램

°주제 : 팔복의 영성과 새 세상 엿보기

°일자 : 9월 14일(화)-15일(수)

°장소: 거창 갈릴리 교회

°강사: 한성수, 유성일,

김경호, 박종국

지역소식

1. 수도권

• 10월 정기모

일시 : 2010년 10월 19일(화) 오후 7:30

장소 : 향린교회 2층 어린이부실

특강 : G20 회의의 암울한 전망

강사 : 김어진 공동운영위원장(G20 대응 민중행동)

• 11월 정기모임

일시 : 11월 9일(화) 오후 7:30

장소 : 향린교회 2층 어린이부 예배실

특강 : 한미 FTA와 G20정상회담 그리고 의료보험문제

강사 : 우석균 선생(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2. 대전 청주 합동 모임 (8월 11일)

예수살기 연대활동

9. 12

희년주일 실천 생명의 강지키기 연합 예배 안내

°일시: 9월 12일(주일) 오후 4시,

°장소: 광화문 감리회관(동화면세점) 앞 희망광장.

°대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강을 사랑하는 모든 기독교인들.

9. 27

한상렬목사 석방 기도회

°일시: 9월 27일

°장소: 서울지방법원앞

10. 4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4대 종단 성직자 단식 촛불 기도회’

°일시 : 2010년 10월 4일(월) 오후 2시 - 6일 오후 10시

°장소 : 개신교 집결장소 4일 2시 성공회 성당,

가입원서

이 름

( 년 월 일 생 )

주 소

소속교회

단체

휴대전화

교회전화 :

이메일

집전화 :

금 액

( )만원, / 희망인출일( )

(인출이 안될 경우 당월 10, 20, 30일경 1회에 한 해 재인출 됩니다.)

회비(후원금)의 은행자동이체(CMS)에

동의하며 이를 신청합니다

계좌번호

계좌번호:

예 금 주: 은행:

주민등록번호

(CMS 신청서)

* 출금인은 “ 한빛누리공익기금 ”으로 기재됩니다.

* 회비 계좌 : 국민은행 008601-04-042711 예금주 : 예수살기

2010년 월 일 예수살기 앞

* 작성하신 가입원서는 이메일 12345pks@naver.com이나 팩스 02-747-3191 으로 보내주십시오. (가입원서 파일은 홈페이지www.withjesus.or.kr 문서게시판에 올려져 있습니다.)

* 직접 납부하시거나 계좌이체를 원하시는 분은 회비계좌로 보내주시기바랍니다.

예수살기 후원요청서

상임대표의장 : 방영식

상임대표 : 김동한 김병균 김정명 이종희 조헌정 한상렬

총무 : 최헌국

주소 : 서울 종로구 교남동 75번지 2층 http://www.withjesus.or.kr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1세기 민족사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여 참된 예수를 사는 삶을 통해 이 땅에 생명과 평화, 통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가 하나가 되어 실천하고자하는 취지로 ‘예수살기’가 설립되어 3년을 맞고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와 더불어 엇나가고 있는 기독교에 예수살기로 인해 그나마 양심 있는 목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정도는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증언해 보려고 노력하며 예수살기는 교계와 시민사회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귀 교회의 기도와 후원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임을 감사드리며 이에 이 사역을 더욱 매진하기 위하여 내년(2011년)에 귀 교회의 선교후원을 요청 드리오니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구좌 : 국민은행 008601-04-042711 예금주:예수살기

문의: 총무: 최헌국 010-5215-8291 사무국장:변경수 010-7400-2566

주님의 평화를 빌며... 주후 2010년 11월

예 수 살 기

2011 사업계획

함께 가자하며 달려온 예수살기!

이 땅에 빚 진자의 심정으로 한국교회와 민족 앞에

내년 2011년도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 예수살기로

세워지기를 바래봅니다.

내년도 사업계획을 참조하시어 내년 회원교회들의 목회 사업과

함께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1월

2월

3월 둘째 주 예수살기 총회

4월 부활절 후 영성수련회

5월 18일 주간 주일 연합예배

6월

7월

8월 14~15일 통일수련회

9월 둘째 주 성경공부프로그램 세미나

11월 추수감사절 후 전국대회

회계보고

◦예수살기 8월 입금(₩2,285,000)

CMS(\1,0300,00)

국산10,000 권혁문10,000 김경태10,000 김경호30,000 김문찬50,000김상신10,000 김성윤10,000 김성희10,000 김순영5,000 김영진10,000 김용성10,000 김용일10,000 김종수10,000 김주숙5,000 김주연5,000 김준우10,000 김태섭10,000 김현호10,000 김혜은10,000 노청래10,000 류의근10,000 문대골10,000 민명숙10,000 박순종,5000 박영숙10,000 박은규10,000 박종국5,000 박진옥10,000 박철30,000 박혜영10,000 방기순10,000 방영식20,000 방현섭10,000 백창욱10,000 변경수10,000 손규호10,000 손정희10,000 손호현30,000 송무학10,000 송영훈10,000 순인숙10,000 안하원10,000 양재성10,000 엄홍석10,000 오나미10,000 오순자20,000 원기준20,000 원재상10,000 유성일10,000 유연순10,000 유옥주10,000 유요열10,000 유인식10,000 유희영10,000 이건종50,000 이동철10,000 이번영5,000 이병일10,000 이소영5,000 이용안5,000 이윤5,000 이윤기10,000 이재산10,000 이정식10,000 이필완10,000 임채문10,000 장욱10,000 장창원5,000 전경일10,000 정광서20,000 정수일5,000 정수현10,000 정숙자5,000 정우찬10,000 정웅10,000 정은주10,000 정창희10,000 정형영10,000 조헌정30,000 조혜은10,000 최상기5,000 최헌국10,000 추교운30,000 한성수10,000 한정희5,000 형복순10,000 홍종희20,000 황현숙5,000

통장입금 / 개인(\195,000)

김광철10,000 김홍술20,000 문홍근50,000 정재우50,000 이성형20,000 이명희10,000 이종희20,000 임인수10,000 최선화5,000

/ 교회(₩1,060,000)

광주고백50,000 광주무등50,000 광주무진50,000 군산소망60,000 대전고백100,000 부산믿음50,000 서울들꽃향린100,000 서울하늘샘100,000 서울푸른마을50,000 서울향린150,000 전주고백50,000 전주새누리50,000 여수은현200,000

◦예수살기 9월 입금(\2,2355,000)

CMS(\980,000)

국산10,000 권혁문10,000 김경호30,000 김경태10,000 김문찬50,000 김상신10,000 김성윤10,000 김성희10,000 김순영5,000 김영진10,000 김용성10,000 김용일10,000 김종수10,000 김주숙5,000 김주연5,000 김주홍10,000 김준우10,000 김태섭10,000 김현호10,000 김혜은10,000 노청래10,000 류의근10,000 문대골10,000 민명숙10,000 박순종5,000 박영숙10,000 박은규10,000 박종국5,000 박진옥10,000 박철30,000 박혜영10,000 방기순10,000 방영식20,000 방현섭10,000 백창욱10,000 변경수10,000 손규호10,000 손정희10,000 송무학10,000 송영훈10,000 순인숙10,000 안하원10,000 양재성10,000 엄홍석10,000 오나미10,000 오순자20,000 원기준20,000 원재상10,000 유성일10,000 유연순10,000 유옥주10,000 유요열10,000 유희영10,000 이건종50,000 이동철10,000 이번영5,000 이병일10,000 이소영5,000 이용안5,000 이윤5,000 이윤기10,000 이재산10,000 이정식10,000 이필완10,000 임채문10,000 전경일10,000 정광서20,000 정수일10,000정수현10,000 정숙자5,000 정우찬10,000 정웅10,000 정은주10,000 정형영10,000 조헌정30,000 조혜은10,000 최헌국10,000 추교운30,000 한성수10,000 한정희5,000 형복순10,000 홍종희20,000 황현숙5,000

통장입금 / 개인(₩195,000)

김광철10,000 김홍술20,000 문홍근50,000 정재우50,000 이명희10,000 이성형20,000 이종희20,000 임인수10,000 최선화5,000

/ 교회(₩1,060,000)

광주고백50,000 광주무등50,000 광주무진50,000 군산소망60,000 대전고백100,000 부산믿음50,000 서울들꽃향린100,000 서울하늘샘100,000 서울푸른마을50,000 서울향린150,000 전주고백50,000 전주새누리50,000 여수은현200,000

◦예수살기 10월 입금(₩2,235,000)

CMS(\980,000)

국산10,000 권혁문10,000 김경호30,000 김경태10,000 김문찬50,000 김상신10,000 김성윤10,000 김순영5,000 김영진10,000 김용성10,000 김용일10,000 김종수10,000 김주숙5,000 김준우10,000 김태섭10,000 김현호10,000 김혜은10,000 노청래10,000 류의근10,000 문대골10,000 민명숙10,000 박순종5,000 박영숙10,000 박은규10,000 박종국5,000 박진옥10,000 박철30,000 박혜영10,000 방기순10,000 방영식20,000 방현섭10,000 백창욱10,000 변경수10,000 손규호10,000 손정희10,000 손호현30,000 송무학10,000 송영훈10,000 순인숙10,000 안하원10,000 양재성10,000 엄홍석10,000 오나미10,000 오순자20,000 원기준20,000 원재상10,000 유성일10,000 유연순10,000 유옥주10,000 유요열10,000 유인식10,000 유희영10,000 이건종50,000 이번영5,000 이병일10,000 이소영5,000 이용안5,000 이윤5,000 이윤기10,000 이재산10,000 이정식10,000 이필완10,000 임채문10,000 장창원5,000 정광서20,000 정수일5,000 정수현10,000 정숙자5,000 정웅10,000 정우찬10,000 정은주10,000 정창희10,000 정형영10,000 조헌정30,000 조혜은10,000 최헌국10,000 추교운30,000 한성수10,000 한정희5,000 형복순10,000 홍종희20,000 황현숙5,000

통장입금 / 개인(₩195,000)

김광철10,000 김홍술20,000 문홍근50,000 정재우50,000 이명희10,000 이성형20,000 이종희20,000 임인수10,000 최선화5,000

/ 교회(₩1,060,000)

광주고백50,000 광주무등50,000 광주무진50,000 군산소망60,000 대전고백100,000 부산믿음50,000 서울들꽃향린100,000 서울하늘샘100,000 서울푸른마을50,000 서울향린150,000 전주고백50,000 전주새누리50,000 여수은현200,000

* CMS 입금은 당월 잔고부족 등 미인출시 다음 달에 인출되지 않기에 해당월은 미납처리가 됩니다. 참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예수살기소식지 2010년2호(통권 5호)

발행인: 방영식

편집인: 최헌국 변경수

발행일: 2010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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